장흥·강진해역에 왜구 노략질 방어 목적으로 설치
조선 중종 때 만들어진 우수영 소속 거진(巨鎭)
일본 대마도 어선 출몰시 해양방어 요충지 역할
국립해양수산박물관 유치…문화유산 공유 기대

 

완도 장도 전경. 장도에서 도보로 5∼7분 떨어진 곳에 국립해양수산박물관이 들어선다./완도군 제공
전남 완도군 국립해양수산박물관 예정 부지. 맞은편에 장도가 보인다./전남도 제공

완도여객선터미널에서 완도군청으로 향하다보면 오른편으로 경사진 길이 열려있다. 군립도서관으로 접어드는 골목길이다. 군립도서관 앞에 정면 5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이 가리포진의 객사다. 가리포진은 1522년(중종 17)에 설치되었다. 같은 해 수군진성이 축조된 것으로 확인된다. 가리포진은 우수영 소속 거진(巨鎭)으로, 예하에 8개의 수군진을 관할하였다. 즉 장흥의 회령포진, 강진의 고금도진·신지도진·마도진, 해남의 이진·어란진, 진도의 남도포진·금갑도진 등이다.

조선 중종 때 왜 완도 군내리에 가리포진을 설치하였을까? 1522년 5월 7일 병조판서 장순손이 이르기를, “남해의 미조항, 여수의 방답진, 강진의 가리포에 수군진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이곳은 해양방어의 긴요한 요충지입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그 이유는 왜구 침입 때문이었다. 왜구 출몰은 여말선초 이래로 지속되고 있었다.

특히 대마도 사람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우리 해역을 침범하여 고기잡이를 했다. 대마도주는 토산물을 가지고 와서 수시로 양식을 얻어 가더니, 급기야 “귀국의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자 하오니 허락해주십시오.”라고 수차례 요청하였다. 조선 세종은 대마도주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의 생활이 곤궁하여 여러 차례 조선 어장에서 어로활동을 요청하니 허락한다. 다만 선박의 크기에 따라 어장세를 납부하도록 하라.”라고 입어 조건을 달아 출입을 허용해주었다. 이것이 조선과 대마도 간에 맺은 금어조약이다.

이후 일본인들은 대마도와 남해를 잇는 뱃길을 빈번하게 드나들었다. 그들이 가장 선호한 뱃길은 경상도 미조항으로 들어와 어로활동을 한 다음 연화도와 욕지도를 경유하는 코스였다. 점차 일본인들의 항해는 남해에서 서해로 넘나들었고, 장흥과 강진 해역까지 침범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들을 방어하기 위해 완도 가리포에 수군진을 설치한 것이다. 가리포진의 수군첨사가 장흥과 강진 일원의 수군진을 관장하였다.

1722년(경종 2) 9월 초 6일에 제123대 가리포진 수군첨사 이형이 도임하였다. 그는 아사(衙舍) 안팎을 수 차례 수리하여 새롭게 중창하였다. 뒤이어 객사를 새로 건립하고, 섬 주민들을 진휼하였다. 객사란 관아의 부속시설 가운데 서열이 가장 높은 건물이다. 이런 까닭에 객사 중앙의 정청(政廳)에 임금을 상징하는 궐(闕) 자를 새긴 위패 모양의 나무 패(牌)를 봉안하고, 그 앞에 수군첨사가 앉아서 직무를 수행하였다. 정청 좌우에는 온돌방을 갖추고, 관아를 방문한 관리들이 체류하도록 하였다. 수군첨사 이형의 행적이 암행어사에 의해 중앙에 보고되었고, 그 공로로 첨사 이형이 승진하였다고 한다. 이형의 임기가 만료되자, 섬 주민들이 그의 재임을 호소하였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완도 군내리 일원에 일명 ‘삼망산 봉수’라 부르는 요망대가 분포한다. 즉 동망산·서망산·남망산이다. 봉수는 바다에 위급한 일이 발생할 경우 낮에는 토끼 똥을 태워 연기로 알리고, 야간에는 횃불을 밝혔다고 한다. 동망산은 해발 158.6m로, 정상에 완도타워가 있다. 완도타워에서 바라보면 북쪽으로 완도항과 고금도, 동쪽으로 신지도, 남쪽으로 완도군의 부속도서, 서쪽은 완도읍을 조망할 수 있다.

가리포진이 독진으로 개편될때 상급관부인 우수영에서 가리포진으로 이관한 인적, 물적 정보와 운영규칙을 정리한 가리포독진절목 표지./김경옥 제공

지난해 12월에 완도문화원(원장 추강래)에서 ‘국역 가리포진’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가리포진 관련 고문서를 수집하여 국역한 것이다. 주된 내용은 1522년에 가리포진이 창설되었을 당시 초대 수군첨사 이반(李班)부터 고종 때 수군첨사 명선욱(明瑄煜)까지 총 206명의 이력을 정리한 ‘가리포진 첨사 선생안’, 1854년(철종 5)에 가리포진이 독진(獨鎭)으로 개편될 때 상급관부인 우수영에서 가리포진으로 이관한 인적·물적 정보와 운영 규칙을 정리한 ‘절목(節目)’, 1895년(고종 32)에 가리포진 수군첨사가 작성한 보고서(위치, 설치, 면적, 경계, 면리, 호구, 산물, 풍속, 토지, 고적, 봉수, 전선, 군총, 상납 등)인 ‘가리포진 사례성책’등이다. 이를 통해 가리포진이 완도에 설치된 배경, 가리포진에 도임한 역대 수군첨사들의 이름, 출신, 재임 시 활동, 특이사항으로 선박건조, 진휼정책, 객사보수, 수군훈련 등에 관한 상세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1522년 가리포진이 창설 당시 초대 수군첨사부터 총 206명의 이력을 정리한 가리포진 첨사 선생안 책자 표지./김경옥 제공

최근 해양수산부는 “전남의 해양·수산의 역사와 문화, 해양생태계의 전시·교육·연구하는 복합해양문화시설인 국립해양수산박물관을 완도군에 건립한다.”고 발표하였다. 완도군의 크고 작은 섬에 전승되고 있는 다양한 문화유산이 지역민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장(場)으로 거듭 나길 기원한다.

글/김경옥(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정리/김우관 기자 kwg@namd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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