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한평생 공부를 해 온 그 지고지순(至高至純)한 뜻을 찰나에 잃는다! 그 말씀이신가?”조대감이 말했다.“백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 득의개오(得意改悟) 하여 천신만고 끝에 얻은 여의주가 주둥이에서 찰나에 떨어져 나가 버린다 그 말일세! 위아래로 쾌락과 평안의 짜릿한 신경 줄이 연결되어 있어 단, 한순간도 그 순간을 어기지 않고 정상 작동하고 있기에, 절대로 그것을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찰나에 몰려드는 욕망과 쾌락에 젖어 그것을 깜박 잊어버려 모든 것을 놓쳐버린다 그 말일세! 그러기에 평생수행(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용이나 귀는 죽는대도 제가 살던 진흙 구렁 속이지만, 봉은 죽으면 저 높고 화려한 누각(樓閣) 끝에서 바로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해 진흙 구렁 속에 머리가 깊숙이 처박혀 머리가 깨져 울지도 못하고 죽는 것이라네! 그래서 그것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까지 발버둥을 치는 것이라네! 그것이 봉의 운명이라네!”윤처사가 거침없이 말했다.“으음! 과연 그렇군!……권력(權力)의 말로(末路)가 참으로 비참(悲慘)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던가!”조대감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천하의 권력을 틀어쥔 진시황에 한고조 유방이며 촉의 유비, 송태조 조광윤에 당태종 이세민 같은 권력자를 용이라고 일컬으며, 용안(龍顔)에 여의주(如意珠)를 물고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權力者)라 하여, 그들의 상을 용상(龍象)이라 하는데 윤처사는 전혀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닌가?“허흠! 용이라?……”조대감이 의아한 눈빛으로 윤처사를 바라보며 말했다.“세속의 권력을 틀어쥔 황제나 왕을 용이라 칭하는 것은, 천하대도(天下大道)를 깨달아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을 모독하는 것일세! 한갓 세속의 권력을 거머
매사에 자기 나름의 투철한 수행(修行)과 사색(思索)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독창적인 세계관(世界觀)을 가진 윤처사였기에 조대감은 귀를 쫑긋 세웠던 것이었다.바로 자기만의 주관적인 세계관과 삶의 실천, 그것이 늘 조대감 자신을 앞서가는 윤처사였다. 그러기에 각별한 친구로 여기고 있었고 또 옥동의 스승으로 삼으려고 달려온 것이 아닌가!“허어흠! 평생 따뜻한 잠자리에 기름진 밥만 쫓아 사는 하찮은 무지렁이들은 차지하고, 이 세상에는 용귀봉(龍龜鳳) 바로 세 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다네!”윤처사가 말했다.“용귀봉이라? 그것이 과연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그들 수준의 영재는 고작 과거에나 급제하여 어사화 쓰고 헛기침하며 채찍이나 휘두르면서 기름진 밥술이나 뜨면서 거들먹거리는 그런 속물 제자 하나 만드는 것 아니던가! 어허흠!”윤처사가 말을 마치고 크게 기침을 했다.조대감은 윤처사의 기세에 눌려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은 카랑카랑한 옛 대쪽 선비의 서슬 퍼런 기상을 느꼈기 때문이었다.“세속을 살아가는 권속(眷屬) 무지렁이들이야 세태 돌아가는 것과 무관하게 늘 제 한 목숨만을 위하여 부귀영화(富貴榮華)와 명리(名利)와 안락(安樂)만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허흠! 맹자(孟子)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 그것은 조대감이 크게 잘못 알고 있음이야! 나 같은 자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말일세!”윤처사가 바로 조대감의 말을 단번에 잘라버렸다.“어허! 어찌하여 그러시는가? 성현 맹자께서 군자유삼락(君子有三樂)을 말씀하시면서 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父母具存 兄弟無故 一樂也),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굽어보아 세상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仰不愧於天 俯不作於人 二樂也),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
어린 시절 세상을 향한 가슴에 웅비(雄飛)하던 청운(靑雲)의 꿈은 사라지고 관록(官祿)과 출세를 위한 줄서기를 하면서 초라한 관리 생활을 하기가 일쑤이건만 그 안에 백성의 안위 따위가 있었던 것이던가?왕이 내려준 벼슬자리에 취해 백성들 위에 군림하면서 요령껏 그들을 수탈하여 제 배나 채우면서 탐관오리 소리나 듣지 않았으면 다행이지 않겠는가? 왕에게 충성하는 신하가 되었으면 그만이지, 어찌 백성을 위한 관리가 되기가 그리 쉬운 일이던가! 윗사람 비위를 잘 맞추기 위하여 철 따라 뇌물(賂物) 바치고, 자리 보존 잘하다가 또 좋은 윗자리
조대감은 혼잣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음날 오십 리 길 산골 마을에 떨어져 사는 친구 윤처사를 찾아가기로 마음을 먹고 집안일을 하는 사내종을 불러 채비를 단단히 이르는 것이었다.주인 놈은 종일 빈둥거리며 기생집 술타령을 하며 놀기만 하여도 그 집에서 일하는 일꾼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죽도록 일하여 집안을 지켜주니 그 집안이 잘되는 것처럼, 뛰어난 충신 하나가 어리석은 사람을 황제로 만들어 주는 것이었으니, 저 조선을 건국했던 이성계 앞에서 정도전이 자신을, 어리석은 유방을 한나라의 황제로 만들어 준 장량에 비유했다고 하던가? 요는 뛰어난
어느 마을에 백석 꾼 부자가 있었는데 그 집안의 일꾼이 누구냐에 따라서 한해 농사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나무지게에 풀 한 짐 해 나르고, 낮에는 논밭 일하고, 오후에는 산에 올라가 나무지게에 한 짐 나무를 해 나르고, 석양에는 소여물 쑤어 먹이고 밤에는 또 새끼를 꼬아 멍석을 만들고 이렇게 부지런한 일꾼이 들어오면 그 집은 번성(蕃盛)하는 것이었다.그러나 그 집 일꾼이 주인 눈치나 살살 보며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한다면 그 집 농사는 망하고 마는 것이었다.일꾼 하나 잘 들이고 못 들이고가 그 집안의 흥망성쇠(興亡盛衰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이 일대에서는 아들 옥동을 맡아서 잘 가르쳐 줄 사람은 오직 윤처사 밖에는 더 없었던 것이었다. 모름지기 사람을 가르쳐 훈육(訓育)한다는 것은, 몰개성(沒個性)으로 오로지 문자암송(文子暗誦)과 온갖 지식(智識)만을 천편일률(千篇一律) 강제로 주입(注入)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지닌 특별한 개성을 찾아내 스스로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성장시켜내는 것 아니겠는가! 조대감은 거기까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조대감은 조만간 윤처사를 찾아가 아들 교육을 부탁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 먹는 것이었다.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그리하여 퇴계(退溪) 이황이 죽음을 맞으려 할 때 지리산(智異山) 동쪽에 살던 처사 남명(南冥) 조식(曺植)에게 비문을 부탁하면서 ‘처사라고 써달라고 하였다던가?’ 그 말을 들은 남명 조식이 ‘할 벼슬은 다 한 사람이 처사라니?……’ 라고 말했다고 하던가?열두 번 지리산을 올랐다는 남명 조식은 그의 문집 지리산 기행기 유두류록(流頭流錄)에서 고려 무신정권 때 혼란한 세상을 피해 벼슬을 주어도 마다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산 한유한, 연산군 때 처자를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살았지만 죽임을 당하고 만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허허! 내 애초 귀한 자식을 얻을 귀자득복(貴子得福)이 없는 팔자인데, 그것을 바랐던 것이 죄(罪)란 말인가!”조대감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하는 것이었다.대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누린다는 오복(五福)은 무엇일까? 서경(書經) 홍범편(洪範編)에 이르기를 그 첫째를 수(壽), 오래 사는 것이라 하였고 그 두 번째를 부(富)라 하였으니 재물이 넉넉함을 이름이요, 그 셋째가 강녕(康寧)이니 건강이었고, 그 넷째가 유호덕(攸好德)이니 이웃에 선행(善行)을 베풀어 덕을 쌓는 것이요, 다섯째가 고종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그런 후로 서너 날 조용하다 싶었는데 또 옥동이 글방에서 글 읽는 소리도 사라져버리고 밖으로 뛰쳐나가 들로 산으로 아이들과 어울려 놀기만 하는 것이었다.다른 일은 무사태평(無事泰平) 평온(平穩)하다 하였지만, 조대감은 아들 옥동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가슴이 답답해 오는 것이었다. 나이 들어 늦게 얻은 자식이기에 더욱 신경이 써지는 것이었다. 일찍 아들을 얻어 인생사(人生事)나 세상사(世上事) 돌아가는 이치(理致)를 잘 가르쳐 주고, 이 집안을 고이 물려주고 늙은 말년을 청아(淸雅)하게 지내다가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허허! 저저 저!……”조대감은 아들 옥동의 말하는 꼴을 보고 혀를 끌끌 찼으나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다. 회초리를 들고 매를 때린다고 하여도 매를 때릴 때뿐이었고, 또 붙잡아서 엄한 훈계(訓戒)를 내린다고 하여도 들을 때뿐 마음속에 일종 아비에 대한 반항심(反抗心)만 더 한다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자식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고 하더니, 마치 그 말이 조대감 자신을 두고 하는 말만 같아 깊은 한숨이 자신도 몰래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물론 대여섯 살 어려서부터 훌륭하다는 훈장(訓長)을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석인(昔人)의 말에 의하면 인생 백 년이 온통 수심(愁心)이라더니……, 사랑방 툇마루에 앉은 조대감은 멀리 가을이 오는 파란 남녘 하늘을 바라보고 우두커니 앉아 고요히 숨결을 가다듬었다. 푸른 봄빛 살아나는 격동(激動)하는 봄을 지나, 실록 우거진 폭염(暴炎)의 여름을 건너, 이제 바야흐로 결실의 가을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살랑살랑 낯을 스치는 바람이 꽤 상쾌하였다. 찌 뜨거운 여름 바람이 가고 그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가을 툇마루에 홀로 앉아있자니 온갖 잡념이 다 씻은 듯이 문득 사라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그렇다면 과연 세종 사후(死後) 그 자리에 무덤을 쓰고 궁궐에는 무슨 일이 있어 났던가?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종기로 2년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 단종은 작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밀려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수양대군에게 반대했던 세종의 아들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이 처참하게 사약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조카를 내몰아 죽이고 왕이 되었던 수양대군조차 13년 집권 후 지병으로 죽었다. 세조 수양대군의 큰아들 의경세자인 성종의 아버지는 20세에 죽었고, 또 수양대군의
이러한 동기감응론은 훗날 음택풍수(陰宅風水)에 널리 적용(適用)되었는데, 돌아가신 부모를 명당에 쓰면 그 유골(遺骨)이 지닌 유전자(遺傳子)에 기(氣)가 같은 후손(後孫)에게 크게 영향을 미쳐 좋은 기를 보내주기에 후손이 아주 잘 된다는 설로 굳혀졌던 것이었다.조상이 죽어 묻힌 무덤 속 유골과 살아있는 후손들과의 동기감응이라! 훗날 명당발복(明堂發福)으로 귀결되고 만 조선의 음택풍수, 어째 미신(迷信)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과연 미신일까?조선의 성군(聖君)으로 일컬어지는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이 동기감응론을 신통치 않게 여기고 반
이러한 사실은 황제(皇帝)의 귀까지 들어갔다.황제가 생각해 보니 참으로 해괴(駭怪)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벌건 대낮에 아무도 치지 않은 종이 저절로 울리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시절이라면 하늘이 감응(感應)하여 찬사(讚辭)를 보낸 것이라 억지 풀이를 하여 나라에 경사(慶事)가 날 조짐이라고 할만도 하겠지만, 만약 나라 안의 인심이 흉흉하여 백성들이 변란(變亂)이라도 일으킬 조짐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이것이 커다란 빌미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었다. 귀신이 동하여 흉악한 황제를 징벌할 조짐이라고 이구동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퇴계는 얼른 눈을 돌려버렸다. 혹여 누가 보아서는 절대로 아니 되었기 때문이었다. 앞만 보고 걷는 퇴계의 눈시울이 금세 글썽글썽 붉게 물들었다.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건 눈물을 퇴계는 재빨리 옷소매로 씻어버리고는 멀리 흐릿한 하늘로 아무도 모르게 눈을 던져버렸다. 아들이 죽어 오래전에 인연을 끊어버린 류씨 며느리가 개가하여 잘 사는데, 방해(妨害)되어서는 결코 아니 되었기 때문이었다.사람은 과거와 미래의 사이에 놓인 현재를 항상 살아가는 것인데, 현재는 찰나에 과거가 되어버리고 또 미래는 찰나에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잠시 후 집안에서 단정하게 차려입은 준수(俊秀)하게 생긴 유생(儒生) 하나가 대문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다.“아니, 어두워지는 이 밤에 무슨 일인가요?”그 유생이 퇴계를 보고 공손하게 말했다.“한양길을 가는 과객(過客)인데 날이 저물어 하룻밤 신세를 좀 지고 갈까 하여 왔소”퇴계가 말했다.“아! 그러시다면 어서 들어오시지요. 누추하긴 하지만 사랑방에 유(留)했다 가시면 되겠습니다”유생이 말했다.“아이구! 고맙습니다”퇴계가 말했다. 유생이 앞서 걸으며 퇴계를 사랑방으로 안내했다.퇴계가 사랑방에 자리를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