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 아침에 옥동을 깨워서 일찍 밥을 먹이고 서책과 옷가지를 챙기도록 하세요. 오늘 윤처사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이제부터는 거기서 공부를 하도록 해야지요”방문 창호지에 발간 새벽빛 여명(黎明)이 드는 것을 바라보며 조대감이 말했다.“예! 대감!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부인이 말했다.잠시 후 조대감은 동이 트기 무섭게 잠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대감은 사내종들이 일찍 일어나 마구간의 말먹이를 주고 있는 것을 보고 말했다.“오늘은 아침을 먹고 아들 옥동과 함께 어제 갔던 윤처사 집으로 갈 것이니 두 마리의 말을 준비하도록 하여라!”“예
“으으 하하하하하핫!”조대감이 누워있는 방안에서 벌떡 일어나 갑자기 손뼉을 치고 박장대소(拍掌大笑)하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와 집안 가득 울려 퍼졌다. 어제 윤처사와 술을 마시고 돌아와 새벽에 눈을 떠서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자리에 누웠는데, 아직 동도 트기 한참 전인데 이 무슨 기이한 웃음소리란 말인가?“어어! 대, 대감! 무무, 무슨 일이신지요?”조대감 옆에서 잠을 자고 있던 김씨 부인이 느닷없는 웃음소리에 깜짝 놀란 얼굴로 눈을 번쩍 뜨고 어둠 속의 조대감을 바라보며 말했다.“으음! 부, 부인! 내 이렇게 어리석을
마상(馬上)에서 조대감은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다가 그만 치밀어 오르는 술기에 젖어 이리저리 마치 바람에 하늘거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흐느적거렸다. 말 잘 듣는 뛰어난 자식을 얻었다면 이런 일도 없을 것인데 어찌 늦게 본 금과옥조(金科玉條) 같은 아들이 천방지축으로 속없이 날뛰는 개구쟁이란 말인가! 그러나 일없이 잘 자라는 아들을 두었다면 만사형통(萬事亨通)으로 넉넉하게 자만(自慢)하며 자식 둔 자로서 인생의 매운맛이란 전혀 모르고 살다가 죽으련만, 말 안 듣는 고약한 아들을 두었기에 이런 인생의 이면(裏面)을 실컷 고뇌(苦惱)하며
조대감은 웃음을 터트리다가 문득 앞을 바라보았다. 먼 하늘 아래 커다란 산이 놓여 있었다. 조대감은 숨을 깊이 들여 마셨다.“하하하하하!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날고,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살을 거슬러 오른다.’라고했던가!(大鵬逆風飛, 生魚逆水泳)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냐?”조대감은 크게 소리치며 문득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았다. 천하대의(天下大義)를 위하여 한 번도 깊이 생각한 적도 없었고, 더구나 자신을 희생한 적도 없이 오직 자신의 삶만을 위하여 그냥 살아온 인생이 아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조대감은 그만 말 등위에서
마상(馬上)에 앉아서 취기가 잔뜩 올라 흔들거리며 가는 조대감의 몽롱(朦朧)한 머릿속에 그러한 구절들이 연달아 떠오르는 것이었다.낱알 몇 알 훔쳐먹으려고 탱자 가시 울타리 속에 떼로 모여 앉아서 ‘너 잘났네! 나 잘났네!’ 하고 아웅다웅 다투며 사는 참새가 어찌 더 구만리 장천을 날아오르려는 대붕의 뜻을 알 리 있겠는가? 위수 강가에서 빈 낚시를 드리우고 참담한 시대의 흉악한 폭군을 제거하고 새로운 시대를 낚으려고 했던 무성왕(武成王) 강태공(姜太公)은 여름날 마당에 널어놓은 보리가 소나기에 쓸려나가는 줄도 모르고 책을 보며 깊은
조대감이 엉겁결에 간신히 입을 열고 더듬거렸다.“무슨 말씀하시려는지 잘 아네만, 각설(却說)하고 조대감! 그깟 문자암기교육(文字暗記敎育)이나 시키려 하거든 번질나게 잘하는 곳에 가서 얼른 알아보아야 할 것이야! 내가 오늘 했던 말을 곰곰이 잘 생각해 보시게나!”윤처사가 말을 마치고 일어나는데 술기가 오르는지 순간 기우뚱 비틀거리는 것이었다.“아니! 술이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 몸으로 어디를 가시려는 것인가?”조대감이 걱정되어 말했다.“하하하! 어찌 이 다 낡아빠진 귀찮은 몸을 데리고 가는 것만을 생각하시는가? 아직도 모르시는가?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으음! 참으로 가슴에 깊이 와서 닫는 시문(詩文)일세! 도연명 선생이야말로 유사이래(有史以來)로 선비들에게, 선비의 시초(始初)로 높이 추앙(推仰)받는 큰 인물이지 않은가!”조대감이 술잔을 들고 윤처사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렇지! 그러나 사람들은 시문(詩文)만 좋아하고, 그의 올곧은 정신(精神)이나 가난하고 고된 삶을 좋아하지 않는 법이네! 그래서 세상에 참된 위인(偉人)이 드문 법이 아니겠는가?”윤처사가 덩달아 술잔을 들며 말했다. 윤처사와 조대감은 술을 마시고는 술병을 들어 서로의 빈 잔을 번갈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조대감이 묵묵히 윤처사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으음! 올곧은 선비라! 옳은 말씀이시네! ‘5두미(五斗米)의 녹봉(綠峯) 때문에 허리를 굽히고 시찰 나오는 향리(鄕吏)의 소인(小人)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고 말하고는 80일간의 평택현 현령 자리를 도연명 선생이 곧바로 때려 치워버리고 낙향(落鄕)하며 쓴 시가 바로 그 유명한 귀거래사 아닌가!”조대감이 맞장구치며 말했다. 취기(醉氣)가 성큼 오른 얼굴의 윤처사가 지그시 눈을 감더니 또 한 수의 시를 읊조리는 것이었다.사람으로 살아오는 동안(自余
“실패의 고난(苦難) 없이 승승장구(乘勝長驅)했더라면 어찌 그런 선비들이 대대로 애송(愛誦)하는 누실명(陋室名) 같은 명시(名詩)가 인류사(人類史)에 나올 수 있었겠는가?”조대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런데, 내 보기에는 경전(經典)만 죽도록 암기해 등과한 입신출세(立身出世) 고속가도(高速街道)를 달리려는, 그런 이기적(利己的)인 작자들에게는 유우석, 유종원 선생 같은 그런 득의득도(得意得道)의 순정한 경지는 절대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일세! 식색지성(食色之性)에 깊이 빠져 살아가는 자들이 비단 무지렁이 무지한 백성들만 그런
윤처사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시더니 말을 이었다.“인생살이라는 것을 잘 뜯어보면, 대개가 초년이 좋으면 말년이 좋지 않고, 초년에 좋지 않으면 말년이 좋은 법이네! 만약 다 좋지 않았다면, 다 좋은 일이 한꺼번에 생길 것이고, 다 좋았다면 함께 몰락(沒落)할 나쁜 일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법이네. 그것은 우주자연(宇宙自然) 역(易)의 변화원리(變化原理)가 그래서 그러는 것일세! 조대감도 잘 알겠지만, 높은 산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맞는 깊은 강이 있게 마련이고, 춘하추동(春夏秋冬)!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윤처사가 읊은 그 시를 들은 조대감이 슬그머니 윤처사의 집을 곁눈질로 얼른 훑어보았다. 옛 대궐 같았던 집은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성한 데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처사가 반듯하게 출사하여 집안을 돌보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아왔으니 집안 돌볼 여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었다. 그것 때문으로 저 유우석(劉禹錫)의 누추한 집에 대한 변명 같은 누실명(陋室名)을 읊어 자신의 처지를 위안(慰安)하려 하거나 혹은 드러내려 함은 아닐까? 하고 조대감은 찰나에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조대감은 스치는 생각을 숨기고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으음! 참으로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어어흠!……그그 그렇구만!……”조대감이 잠시 숨을 고르고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고 보면 저 윤처사는 자신이 선 자리에서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성찰(省察)하며 살아왔다고 한다면, 조대감 자신은 아무 생각 없이 주어진 상황 그대로 그 상황을 옳다고만 무턱대고 받아들여 그 상황 속에서 오직 자신의 일취월장(日就月將)만을 바라며 살아온 것이 아닌가! ‘과연, 어느 것이 식자(識者)다운 삶일까?’ 하는 깊은 의문(疑問)이 문득 조대감의 뇌리(腦裏)를 번쩍 스쳐 가는 것이었다.“조대감! 그러나 생각해 보니
조대감은 대답 대신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윤처사가 그런 조대감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가 술잔을 들어 한잔 ‘쭉!’ 들이켜 마시고는 이미 식어버린 된장국을 수저로 한술 떠서 먹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대감은 빈 술잔에 술병을 들어 채워주었다. 술잔을 받고 상위에 놓은 윤처사가 조대감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근본적(根本的)으로 제 배 속이나 따뜻하게 채울 욕심 많고, 남 잘 때려 이기는 짓 잘하고, 간악하게 없는 일 만들어 트집 잡아 모함(謀陷)하여 생사람 잡기 좋아하고, 잘난 채 우쭐거리기 즐겨 하고, 남 험담하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모든 인간사는 하나로 통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 해보니 나는 문자(文字)를 좀 배웠다고 자부하고 사는 지식인데도 실상은 저 꿩사냥 일자무식(一字無識)이라는 일서보다도 더 못한 것 아닌가 싶어졌다네!”윤처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허흠! 그 그런가!……”조대감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실상 조대감은 살아오면서 한 손에 채찍을 거머쥔 관리로 살아왔기에 그러한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더구나 무지렁이 백성의 기이한 행위 따위야 도무지 생각할 거리가 전혀 아니었다.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허허! 사냥꾼 일서의 꿩 사냥이 입신을 넘어 화타경지(華他境地)라!……”조대감이 탄성을 지르며 입을 닫지 못하고 말했다.“숨을 고른 일서가 활과 화살을 시위에 들고는 찰나에 돌아서서 꿩을 발견해 가차 없이 화살을 날리는 것이었는데, 단 한 개 가지고 간 화살을 쏘아 실패하면 꿩에게 졌으니까 집으로 그냥 돌아오는 것이었고, 성공하면 그날은 꿩고기를 먹는 것이었지”윤처사가 말했다.“허흠! 그런데 왜 일서라는 사냥꾼은 화살을 단 한 개만 가지고 간단 말인가?”조대감이 말했다.“조대감! 생명은 단 하나뿐인
윤처사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조대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렇지! 사냥꾼 일서는 꿩이 날아가 어디서 날개를 접고 내리는가 그 지점을 눈여겨보았다가 그 꿩을 향해 천천히 접근하는 것이었네. 꿩은 일단 날개를 펴고 날아가서 앉으면 습성상(習性相) 그 위로 열 걸음에서 서른 걸음 올라가 풀숲이나 나무 밑에 앉아 은밀히 은신(隱身)하여 누가 잡으러 오나 하고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네”“사람에게 쫓겨서 도망 왔으니까 숨어서 혹시 이곳을 알고 헐레벌떡 황급히 쫓아오지 않나 하고 지켜보고 있는 것이로구만!”조대감이 말했다.“그렇지
윤처사가 조용히 술 한잔을 들고는 조대감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조대감은 그 말에 흠칫 놀라면서 얼른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슬그머니 태연한 척 살피는 것이었다. 자칫 말을 잘못했다가는 큰일이 날 것을 조대감은 육감적(六感的)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대감은 잠시 생각을 하는 척하다가 말했다.“으음!……그 글쎄! 윤처사! 나는 이 땅에서 록(祿)을 먹은 자가 아니었던가?”아무리 믿음으로 맺어진 친구 윤처사 앞이라 하더라도 조대감은 본능적(本能的)으로 직답(直答)을 회피(回避)해 버리는 것이었다.“하하하! 그 그렇지! 내가 그새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아니면 막연하게 혼탁(混濁)한 세상에는 이름 없이 가난하게 살다가 죽을지언정, 절대로 출사(出仕)해서는 안 된다는 선비의 곧은 신념(信念)을 지키고 살면서 무작정 무정세월(無定歲月)을 낚고 있었던 것일까? 그 만남은 과연 우연(偶然)이었을까? 필연(必然)이었을까?“그야 알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조대감이 말했다.“물론 알 수야 없겠지. 그러나 강태공처럼 그렇게 강호(江湖)에 뜻을 지키고 이름 없이 숨어 사는 선비가 사실은 부지기수(不知其數)로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일세. 강태공이 주 문왕
“어어! 어어흠!……머 먼저 드시지 않고?……”조대감은 할 말이 없어 그냥 밥상 앞에 앉으며 머쓱하니 말했다.밥상 앞에 앉아 수저를 드는 조대감을 보고 윤처사가 말했다.“먼길 오시느라 많이 시장하셨을 것이야! 어서 드시게!”조대감은 윤처사와 마주 앉아 수저를 들었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을 수저로 한술 떠서 입에 넣고 된장국을 떠서 먹으니 구수한 내음이 입안 가득 풍겼다.“아! 구수한 된장국이 참으로 천하일품(天下一品)이네!”조대감이 말했다.“유붕 자원방래 불역락호(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라고 했던가! 자! 술도 한잔 들세!”윤처
그림 진소방(중국 사천대학 졸업)윤처사가 단단히 화가 났는지 내뱉듯이 말하다가 잠시 숨을 돌리고는 조대감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그게 바로 참새와 학이 죽어도 한 가지에 앉아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까닭일세! 으음!........ 조대감! 앞으로 다시는 날 찾지 마시게!”말을 마친 윤처사가 사납게 돌아서 버리는 것이었다.“어어! 이이 이 사람아!........”조대감이 얼떨결에 말을 잇지 못하고 돌아서 가는 윤처사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조대감은 머리에 커다란 쇠뭉치라도 얻어맞은 양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